[관광휴양지]묘도
묘도는 광양만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섬으로서, 남쪽방향으로는 여수시 여수국가산업단지가, 북쪽방향으로는 광양시의 광양제철이 위치한다. 최근 개통한 여수산단진입도로에의해 차량으로 다다를 수 있으며, 광양 중마동~묘도사이는 이순신대교, 묘도~여수 삼일동 사이는 여수대교로 이어진다.
묘도는 한자(漢字)로 猫島, 즉 고양이섬이다.
묘도 봉화산(해발 246m)에 여수석유화학단지 애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공원이 세워진다.
여수시는 2012여수세계박람회 개최에 맞춰 크리스탈 야경으로 불리는 국가산단과 이순신대교, 광양제철소 등을 조망할 수 있는 묘도 봉화산 전망공원 조성사업을 착공한다고 밝혔다.
여수시 '2013 주요투자사업'에서 「묘도 봉화산 공원 조성사업」을 살펴보면,
여수시 묘도동 산160번지 일원에 22.5억언을 들여 공원조성 1,200㎡, 봉수대정비, 보행자도로 등을 사업기간(2012~2013)동안 조성할 계획이다.
'2013 주요투자사업' 「묘도 봉화산 공원 조성사업」자료 =>019.pdf
묘도는 행정구역상으로 묘도동에 속하며, 그 안에는 묘읍, 온동, 창촌, 광양포, 도독 등의 마을이 분포한다.
[묘읍]
묘읍부락은 서기 1450년경에 묘도의 고을과 넓은 해안을 끼고 있었다고 하여 고을 개포의 이름을 따서 고을개라 불러오다 조선말기 묘도의 3개 촌락중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묘읍이라 하였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돌산군 태인면 지역이었으나 온돌개. 괭이골, 읍포를 합하여 묘도리라 칭하고 여수군 삼일읍에 편입시켜 지금까지 묘읍으로 부르고 있음.
묘읍은 삼한시대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의 돌킬, 돌도키 등의 예전에 발굴 되었으나 지금은 찾을수가 없음.
이곳의 지명 : 괭이골. 광양포, 도독포. 굴바구. 굴암 등이다. 특히 굴바구는 임진란때 피난민들이 많이 이곳에 피난하였다고 한다.
지금부터 서기 1500년경에 제주고씨 고담이란분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분들의 후손이 살고 있으나 몇세대가 되는 실정이다. 고담의 후손인 16세손인 고신길씨가 이 마을에 살고있음.
서기 1600년경에 김영길씨 김임원씨가 경남 창녕에서 입향 후손은 김현길 등 김임원의 후손 13세손이 살고 있음.
서기 1700년경에 경주이씨와 김해김씨가 이곳에 입향하였다. 경주이씨 이은복씨는 주이씨 이갈평 34손이 이곳에 입향 그후에는 이상휴씨가 있으며 이상욱은 전남관에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음. 김해김씨 김제복씨가 서기 1800년에 남해에서 입향 후손 김기윤씨가 살고있다.
- 면 적 : 24.5㎢, (전 6.2㎢ 답4.8㎢, 임야 12.9㎢ 기타0.6㎢).
- 특 징 : 어촌마을로 호상제가 조직되어 애경사시 전주민 동원되어 처리함. 상여. 혼구. 농악, 기물, 묘도중학교가 이 마을에 있음.
[온동]
온동부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조 선조 24년(서기 1591년 신묘년에 온돌 또는 온돌포라 불려워왔다. 1914년 전국적으로 행정구역 조정함에 따라 돌산군 태인에 속해 있던 온돌개리를 여수군 삼일면 온동리로 펀입운영 하게되었다. 1976년에 여수 공단조성으로 인해 전라남도 여천지구 출장소 삼일지소 온동리로 운영하다가 1986. 1월 1일 시 승격으로 묘도동에 속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초기에 구둘방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서 한옥을 짓게 되면 방에다 구둘을 놓게된는데. 여기서 방독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여수 여천지구에 구둘장을 옮겨 사용하게 됨으로 구둘방이라고 부르다가 지금 온동으로 보르고 있다.
남양방씨 방명국씨는 이조성종 15년 서기 1484년 갑진년에 전라북도 남원에서 묘도 창촌에 입향 하였으며. 그후 새손인 방호생씨가 자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온돌개리로 이주하여 후세들이 세거하고 있다.
시조 방계흥 고려시대 벽산공신 삼중대광 보국을 지냈으며 22대손인 방명국씨는 통정대부 벼슬을 지냈으며, 임진란때 남양방씨 26대후손 방호생씨가 창촌에서 온돌개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번창했다. 방호생씨는,통정대부 벼슬을 중식 받았다.
방호생씨의 후손인 12대 방대현씨가 살고 있으며 이분의 후손 16대손이 출생되어 살고 있음.
경주정씨 시조는 정지백호이나 경주정씨 1새로는 경주 군수를 지낸 정진후가 씨족이다. 이분은 정당문학 금자광록대부를 지냈으며 이분에 30대 후손인 정태봉씨가 묘도에 입향한 것은 임란 이후이다. 그분의 후손 16대가 이곳에 살고 있으며.후손인 정종헌씨가 묘도동 1대 동장이며 정성환과 이상옥씨가 함께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음.
남양방씨14호, 경주정씨24호, 김해김씨23호, 밀약박씨 5호,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입향은 삼일동에 입향이 따로 기록된다.
- 면 적 : 130.2㎢ (전 26.8㎢, 답 14.4㎢, 임야 89㎢).
- 특 징 : 해상교통이 불편하여 온동부락 주민 전체가 모금하여 철선 11톤을 운영하여 온동에서 월내동 여수시로 운행함. 상포계 혼인계 농악기물 등.
- 기 타 : 이 마을은 장양제펀 중장과 수딘 1키로미터 떨어져 있으여 앞으로 광양컨테이너 부두가 생기면 이곳 마을이 내 외국인 관장지 개발로 유력시 되고 있다.
[창촌]
창춘부락은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조선이 서기 1392년에 창업하게 된후에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주민이 운집하며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마을은 주민이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다.
특히 창촌이란 지명은 어느때인지 상세하게 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과 정유 재란때에 이충무공과 명나라 진인도독이 왜군 소서행장 막하 부대를 무치르기 위해 이곳성 도독에다 진을 치고 있으면서 육지로 부터 쌀과 곡식을(군량미)창과 칼, 화살,무기류 등을 보관하던 창고 "현 묘도초교 터에다 창고를 만들어 보관해 오던 것이며 그후에 이 곳 3개 마을에서 나오는 오곡과 어패류 건어물 등을 창고에 보관 여수 순천둥지에 수송한곳이라고 해서 창촌이라고 지명이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묘도 창촌은 당초에 돌산군 태인면의 지역으로 섬의 모양이 고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괴섬 또는 고양이 섬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괭이골, 온돌지.
읍포등을 병합하여 묘도라고 해서 여수군 삼일면에 편입을 시켜 운영 1949년 여천군으로, 1976년 출장소로, 1986. 1. 1일 여천시에 속함.
창촌부락은 서기 1396년경쯤에 설씨가 입향하여 살아왔으나 그 수효가 적어 자손들을 퍼뜨리지 못하고 다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남양방씨, 청송심씨, 입향후 김해김씨가 이거하여 살고 있음.
남양방씨의 시조는 방계흥 고려조에 벽상공신의 후손인 22대 방명국씨가 서기 1484년 이곳에 이거했으나 정유재란때에 은들개로 이주함.
청송심씨의 시조는 심흥부로서 고려조에 청성군수를 지냈으며 공민왕때 9공신중의 한 분으로 충의백으로 봉해졌으며, 이분에 심흥부의 4세손 온이 청송 부원군 벼슬을 지냈으며 심온의 20세손 회(淪)의 두 아들중 장남 군이란분이 묘도 창촌에 이거하였으며 이분의 14세손이 심재수임.
김해김씨 김계선씨가 이곳에 임향하여 현재 15세손 김성석씨가 살고있음.
- 입향씨족 : 김해김씨79호, 전주이씨13호. 창원정씨19호, 창송심씨47호, 밀양박씨19호, 진주강씨 6호, 기타33호.
- 면 적 : 224.2㎢, 전 80.2㎢, 답 47.5㎢, 임야 96.5㎢ 기타
- 특 징 : 묘도 창촌은 옛날부터 부녀 농악팀과 어린이 농악팀이 있으며, 전해온 혼례가구, 상여(상포계 동계가 조직)어업의 기지임.
[광양포]
갱개라고 불렀다. 얕은바다 즉 연안을 우리지방 방언으로 갱본이라 부른다. 따라서 갱개는 바다물이 들어와 포구를 만든곳이다. 광양포는 갱개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리값에 가까운 음을 취한 것이다.
광양포라는 지명은 1896년 2월3일 돌산군이 복군되면서부터 나타났다. 이후 묘도 읍동과 같이 묶어져 내려오다가 1986년 1월1일 묘도동 4통으로 격상되었다.
김해김씨 김계선씨가 이곳에 임향하여 현재 15세손 김성석씨가 살고있음.
남양방씨14호, 경주정씨24호, 김해김씨23호, 밀약박씨 5호,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입향은 삼일동에 입향이 따로 기록된다.
- 입향씨족 : 김씨5호, 우씨2호, 유씨2호, 정씨2호, 고씨2호, 남씨1호, 주씨1호, 이씨1호, 장씨1호, 문씨1호, 오씨1호, 한씨1호
- 면적: 전 109.2㎢, 답 69.4㎢, 대지9.91㎢, 임야704.0㎢, 기타148.7㎢이다.
[도독]
도독골 또는 도독개라 불렀으며 임진왜란 대에 조명연합군이 이곳에 주둔한 이래 붙혀진 지명이며 통상 도독이라 칭한다.
- 면 적 : 전138.78㎢, 답89.2㎢, 대지 9.9㎢, 임야 753.6㎢ 기나178.5㎢이다.
- 특 징 : 마을뒤에는 평암산이 솟아있어 서북방향으로 계곡을 만들었고, 민가들은 계곡을 벗어나서 해안에 치우쳐 있으며 서쪽 혹은 서북으로 터전을 잡았다. 따라서 남쪽만 산으로 막혔을 뿐이고 동서와 북은 활짝 열려 광양과 대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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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광양 10분 … 경제효과 2조원대 <세계일보>
‘이순신대교’ 5년만에 개통
총길이 2260m… 세계 4번째
물류비용 연 6300억 절감 효과
광양만권 경제발전 견인 기대
광양만권 경제 발전을 이끌 이순신대교(여수국가산단 진입도로)가 개통됐다. 첫 삽을 뜬 지 5년4개월 만이다. 전남도는 여수시 월내동∼묘도∼광양시 중마동 사이 9.58㎞를 왕복 4차로로 연결한 이순신대교가 개통됐다고 11일 밝혔다.
1조703억원을 들여 완공한 이순신대교는 총길이 2260m로, 국내 현수교 가운데 최대이자 세계에서 4번째로 긴 다리다. 대교 주탑 간 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1545년을 기념한 1545m이며, 양쪽 주탑 높이는 270m로 세계 최고다.
서울 남산(262m)이나 63빌딩(249m)보다도 높은 셈이다. 주탑과 주탑 사이에는 지름 5.35㎜ 강선 1만2800가닥을 촘촘히 엮은 굵은 케이블 두 개를 연결했다.
이순신대교는 선박운항 가능 폭도 국내 최장인 1310m다. 1만8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 용량)급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들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다. 또 내진 1등급으로 설계돼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다고 전남도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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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산업단지 쪽에서 바라본 총 길이 2260m의 이순신대교 전경. 여수시 제공 |
한국개발연구원은 이순신대교 건설에 따른 직접적 경제효과로 생산유발 1조8734억원, 부가가치 유발 3494억원, 고용 창출 2만6192명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전남도는 4월까지 대형 구조물을 받치고 있는 앵커리지에 이순신 장군 동상과 거북선 등을 기록하는 조형물 설치작업과 유지관리사무소 신축을 끝낼 방침이다.
여수시는 이순신대교 개통에 발맞춰 여수산단, 이순신대교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묘도 봉화산에 전망공원과 산책로 조성, 봉수대복원 등 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뮤안=류승종 기자
민간개발로 조성 … 주민 삶의 질 개선 기대
여수 묘도에 에너지 산업과 물류 거점화 구축을 위한 녹색산업단지가 민간개발로 조성된다. 여수=김창화기자 |